문학) 박범신 장편소설 <소금>
박범신, 소금, 한겨레출판사
이 소설은 지금 우리들의 삶이 자본주의 소비체제가 요구하는 빨대를 서로에게 꽂고서 서로 빨고 있는 형국이 아니냐고 묻는 책이다. 가장 빨대를 꽂기 좋은 대상은 아버지란 존재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빨대를 꽂고 빨면서 그 희생을 당연시 하지 않는지 스스로 묻게 한다.
그럼 무엇이 그런 빨대를 만들고 우리에게 서로 빨기를 요청하는 것일까? 작가는 자본주의의 소비체제에 그 혐의를 두고 있다. 맞는 말 아닌가? 우리는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더 많은 물질적 편리와 도구들을 원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한계는 수입을 능가하는 지출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럼 답은 명확해지고 만다. 지출의 지속적인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다.
말은 쉬워도 이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사랑의 이데올로기에 물든 존재들 아닌가? 우리는 주인공인 선명우가 아빠란 자리, 가장의 자리, 남편의 자리, 회사 상무의 자리를 버리고 유랑을 선택하는 것을 볼 것이다. 물론 유랑이 가족의 울타리를 벗아나는 방법이긴 하지만 저절로 해방을 주지는 않는다. 유랑 속에서도 해방의 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선명우는 자신이 극악한 빈곤 속에서 염전에서 염부로 일하다 죽은 아버지에겐 또 다른 빨대였음을 깨닫고 속죄로서 불구자 김승민을 돌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얻는다.
나는 이 소설을 한 마디로 전하고 싶다.
-사랑하지 말라.
도올 김용옥 선생도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사랑하지 말자고.
그럼? 사랑 대신 서로 아껴주는 것이다.
현대적인 사랑은 희생을 강요하는 파시즘적 구조를 닮아있다.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 버리지 않는가? 그것을 깨야만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과연 자신을 희생한 선명우의 아버지 선기철의 사랑은 독자로 하여금 진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부모의 사랑으로서 거룩하고 슬플 수는 있지만 결코 자유로울 수도 행복할 수도 없다.
그러니,
사랑하지 말라!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라.
자유로운 존재가 되면 자연스레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존재가 된다.
사랑과 자유는 정치의 자유와 평등처럼 삶에서 분리되어선 안된는 것이다.
예전의 삶이 부랑이었다면 그즈음 삶은 유랑이었고, 자유였고, 자연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역시 참된 단맛이었다. 누가 인생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말할 참이었다. "인생엔 두 개의 단 맛이 있어. 하나의 단맛은 자본주의적 세계가 퍼뜨린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에서 빨대로 빠는 소비의 단맛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자유를 얻어 몸과 영혼으로 느끼는 해방감의 단맛이야."
그가 얻은 결론은 그랬다. 이가 썩어가기 마련인 단맛에서 새로운 생성을 얻어가는 단맛으로 그 자신의 인생을 극적으로 뒤바꾼 것이었다.
그는 그 자신이 마침내 강물이 됐다고 느꼈다.
아버지를 찾아 하루 150리가 넘는 길을 걸었던, 그리하여 멀고 흰 강의 꿈을 꾸었던 오래전부터 시작된 잠재적인 욕망의 실현이었다. 사랑이, 자유가 왜 강물이 되지 못하겠는가. 겉으로는 흐르는 삶이었지만 속으로는 진실로 머물렀다고 자주 느끼기도 했으며, 그래서 그는 머무르고 흐르는 강이 된 자신이 아주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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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6.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