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복원을 위하여(삼국사기)
1. 유리왕 11년(기원전 9년) 부분노를 시켜 선비를 속국으로 하였다
고구려는 유리왕대에 이미 선비족 일파를 속국으로 다스렸다.
2. 유리왕 33년(기원후 12년) 오이,마리 2만 군사를 주어 서쪽으로 양맥을 치고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하여 한의 고구려현을 빼앗았다.
고구려가 고구려현에서 건국했다면 자기 땅을 자기가 빼앗았다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드라마 주몽에서 졸본이나 집안 등 압록강 유역을 현도군치로 설명하는 건 한국역사인식의 정신병을 설명해 줄 뿐이다.
3. 대무신왕 11년(28년)한나라 요동태수 침공
이 당시 고구려가 집안에 있고 요동군이 요하부근 요양쯤이라면 복속된 선비국의 위치는 대체 어디가 되어야 하는가? 선비가 압록강 이남에 있던가, 동해부근에 있던가, 아니면 부여국 남쪽에 있던가 대체 어디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한나라 요동군은 난하 동부에 있음을 증명하는 기사이며 고구려는 이미 요하부근을 점령하고 있고 어쩌면 요하 건너 요서지방을 장악하고 있음을 밝혀주는 기사다.
선비족은 서요하 상류지역이나 대흥안령 서부지역에 살았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 요하부근 요양 등에 요동군을 설치했다는 이론은 옳지 않다.
4. 대무신왕 20년(37년) 낙랑 습격하여 멸망
요동군과 낙랑군은 인접하여 있다. 그런데 대무신왕이 습격하여 멸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며 그 왕은 최리라고 했다. 최리의 딸이 호동왕자를 사랑한 낙랑공주다. 신라본기에 멸망한 낙랑국 유민이 신라로 망명한 기사를 볼 수 있다. 만일 낙랑군이 평양에 있는 낙랑이라면 태수일 뿐이고 그 딸은 공주가 될 수 없다.
5. 대무신왕 27년(44년) 광무제 낙랑을 쳐서 군현. 살수이남은 한나라에 속했다.
이 기사를 자세히 보면 해군을 보내 점령했다고 나온다. 이는 평양지역의 낙랑국을 쳤다는 말이다. 만일 낙랑군이라면 이웃한 대방군 임둔군 현도군과 함께 연합하여 낙랑지역을 공략했을 것이나 광무제는 그냥 해군을 파견했다고만 나온다. 평양지역의 낙랑은 최리의 낙랑국이다.
6. 민중왕 4년(47년) 잠우락부 대가 대승 등 1만호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의탁.
7. 모본왕 2년(49년) 한나라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했다.
북평은 어딘가. 오늘날 난하 서부유역의 어느 곳일 것이다. 어양은 오늘날의 밀운이다. 상곡은 밀운 서북방이다. 태원은 어디인가. 산서성에 지금도 지명 그대로 남아있다.
8. 태조대왕 3년(55년) 요서에 십성을 쌓아 한나라군에 대비했다.
요서십성의 위치는 찾기 어렵다. 난하유역일 가능성이 있으나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
9. 태조대왕 53년(105년) 부여사신 조공, 한나라 요동 6현을 약탈했다.
요동은 난하 동부유역일 가능성이 크다.
10. 태조대왕 59년(111년) 한 조공 현도에 속하기를 요구했다. [자치통감]에 3월 예맥과 함께 현도를 노략질했다.
모순이다. 조공한 기사와 예맥과 함께 현도를 노략했다는 두 기사가 함께 실려 있다. 유리왕은 2만 군사로 고구려현을 빼앗은 적이 있다. 그 이후 다시 빼앗겼거나 아니면 일시적인 노략일 가능성이 있다.
11. 태조대왕 66년(118년) 예맥과 함께 현도습격 화려성을 쳤다.
왜 고구려는 예맥과 함께 현도를 습격했을까? 현도군에는 고구려현이 있다. 즉 고구려의 최초의 원주지가 현도에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현도는 어디일까? 중심지가 여러 차례 이동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완전히 이동으로만 볼 수 없다. 다만 확장과 축소로 이해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즉 현도 낙랑 요동은 고구려와 끊임없이 싸울 수밖에 없던 한나라북동부 전초세력이다. 한-고구려 싸움에서 영역은 계속 요동쳤을 것이 틀림 없다.
고구려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건국초 유리왕대부터 한나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한다. 왜일까? 압록강 유역이나 요하 중류 지역에서 한나라가 차지한 지역을 공략할 절대적인 필요성과 요구가 있었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일까? 다물, 고토회복에 대한 염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현도는 오늘날 승덕 지방이 중심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12. 태조대왕 69년(121년) 한나라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이 침입하여 예맥의 장수를 죽였다. 아우 수성을 보내어 대항했다. 수성은 현도. 요동 두 군을 쳐서 성을 불사르고 2천여명을 죽였다.
주목할 것은 고구려와 한의 전선이 <현도- 요동/고구려- 예맥>에서 형성되고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요동군과 현도군이 서로 연합하여 대항할 위치라면 주류사학이 말하는 평양 낙랑군설, 집안 현도군->무순 현도군 이동설의 어리석음이 밝혀진다. 요동군도 만일 요양지방을 중심으로 한 요동반도라면 한반도 북부의 낙랑군 집안 서북부의 광대한 현도군, 집안 정서 서남 지역의 요동군이라면 이들에 완전히 포위된 집안의 고구려가 어떻게 그들의 침략을 견딜 수 있겠는가?
여름 4월 선비 8천과 요수현(요동군)을 공경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맞아 싸우다 신창에서 전사했다.
겨울 12월 마한. 예맥의 1만 기병으로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 위구태가 구원했다.
고구려-선비의 연합부대가 현도성을 포위했다. 그럼 유리왕대부터 속국이었던 선비족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만일 서요하 상류지역이라면 고구려와 선비 사이 무순지방에 현도군이 있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 된다. 현도는 왜 고구려와 선비의 연합을 차단하지 않았으며 집안에 틀어박혀 사방이 한나라에 포위된 찌그러진 고구려가 무슨 힘으로 서요하 상류의 속국을 유지하며 선비군을 동원하여 현도성을 포위할 수 있겠는가? 현도는 무순지방에 있을 수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현도는 승덕지방에서 동쪽으로 전진하거나 후퇴하면서 존속했을 것으로 본다.
13. 태조대왕 70년(122년) 마한. 예맥과 요동을 침략, 부여왕이 구원했다.
마한은 어느 마한을 말하는가? 우리나라 고대사를 공부할 때 부족의 대이동을 고려하지 않으면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옥저가 왜 남옥저, 동옥저, 북옥저가 생겼을까? 고구려도 현도군 고구려현이 있고 졸본 고구려가 따로 있을까? 이것은 부족의 이동을 말해준다. 부족이동의 원인은 단군조선의 이동, 기자조선의 멸망, 위만조선의 침략, 그리고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세력의 침략이라고 생각한다.
14. 태조대왕년94년(146년) 가을 8월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했다.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왔다.
요동군 서안평현.
15. 신대왕4년(168년) 한나라 현도군태수 경림 침범.
16. 신대왕 5년(169년) 현도태수 공손탁과 부산적을 토벌.
부산이 어디인가?
17. 신대왕 8년(172년) 한 대군 침입, 명림답부 좌원대첩.
좌원은 어디인가?
18. 고국천왕 6년(184년) 요동태수 침략. 좌원에서 친히 격파.
좌원은 요동과 고구려의 사이에 있다.
19. 고국천왕 19년(197년) 한나라 난을 피해 많은 이가 와서 의탁. 왕이 세상을 떠나 고국천 언덕에 장사.
20. 산상왕 원년(197년) 발기 요동으로 달아나 태수 공손도(공손강의 오류로 보임)에게 의탁. 한나라군과 함께 침략. 왕의 아우 계수가 격파. 발기 자살해 죽음.
21. 산산왕 21년(217년) 한나라 평주사람 하요 1천호를 이끌고 와서 의지.
한나라 평주는 어디인가?
22. 동천왕 12년(238년) 위나라 사마의 공손연ㅌ초벌. 1천여 군사로 도움.
23. 동천왕 19년(245년) 신라북변을 침범.
24. 동천왕 20년(246년) 유주자사 관구검 현도를 거쳐 침공. 비류수 상류에서 맞아 3천명의 목을 벰. 다시 군사를 이끌고 양맥곡에서 싸워 이김. 1천 기병으로 압록구로 도망. 관구검 환도성 함락. 왕 남옥저로 달아남.
양맥은 어디인가?
25. 동천왕 21년 (247년) 평양성으로 천도. 선인왕검의 택지.
동천왕의 평양은 어디인가?
26. 동천왕 22년(248년) 신라 사신 옴.
27. 중천왕 4년 (251년) 관나부인을 서해에 던짐.
28.중천왕 12년(259년)위나라 울지해 침입,양맥곡에서 격파.
29. 서천왕 11년( 280년) 숙신침범.아우 달고를 보내 단로성을 빼앗고 6백여호를부여남쪽 오천으로 옮기고 부락 예닐곱을 속국으로 삼음.
30. 봉상왕 2년(293년) 모용외 침입.왕은 신성으로 피신. 신성태수 고노자 모용외 격파.
신성은 모용외세력과 고구려 중심지 사이에 있다.
31. 봉상왕 5년(296년) 모용외 침입.
32. 미천왕 3년(302년) 군사 3만을거느리고 현도 침입.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미천왕대 평양은 대동강 평양인가, 아니면 동천왕대의 평양인가?
33. 미천왕 12년(311년) 요동군 서안평을 습격하여 취함.
34. 미천왕 14년(313년) 낙랑군 침입하여 포로 2천여구.
미천왕의 낙랑군 멸한 것은 대무신왕대의 낙랑국이 아님을 말해준다.
35. 미천왕 15년(314년) 남으로 대방군을 침공.
36. 미천왕 16년(315년) 현도성을 침.(공파현도성)
37. 미천왕 20년(319년) 진 평주자사 최비 도망옴. 모용외의 극성으로 쳐들어가니 모용외는 그 아들 인에게 요동을 지키게 하고 우리 장수 여노가 하성에 운거. 왕은 자주 군사를 보내어 요동을 경략.
평주의 위치는 어디인가?
38. 미천왕 21년(320년) 군사를 보내어 요둉을 노략.
39. 고국원왕 4년(334년) 평양성 증축.
40. 고국원왕 5년(335년)북쪽 신성을 축.
41. 고국원왕 9년(339년) 연왕 모용황이 침범해 와 신성에 이르렀는데 왕이 동맹을 청하자 물러났다.
42. 고국원왕 12년(342년) 환도성 수리, 국내성 축. 가을 8월 환도성으로 이거하였다.
43. 고국원왕 13년(343년) 평양 동황성(성은 지금 서경 동쪽 목멱산)으로 이거.
44. 고국원왕 15년(345년) 모용황이 모용각을 시켜 남소성을 빼앗고 수병을 남기고 돌아갔다.
모용씨 세력과 고구려의 전선은 남소성이다.
45. 고국원왕 39년(369년) 군사 2만으로 남으로 백제와 싸웠으나 치양에서 패했다.
46. 고국원왕 41년(371년) 백제 3만 군사로 평양성을 공격. 왕 전사.
47. 소수림왕 7년(377년) 백제 3만 군사로 평양성으로 침입. 남으로 백제를 침.
48. 소수림왕 8년(378년) 글안 북쪽 변읍을 침범 여덞 부락을 함락.
글안세력은 어디인가?
49. 고국양왕 2년 ( 385년) 군사 4만으로 요동습격. 요동. 현도 함락시켜 남녀 1만 사로잡아옴. 모용농이 침입하여 요동, 현도 두군을 다시 빼앗아감.
50. 광개토대왕 원년(392년) 9월 글안을 침. 백제 관미성을 함락.
51. 광개토대왕 2년(393년) 백제가 남변을 침범.
53. 광개토대왕 3년(394년) 백제침입을 격퇴. 일곱성을 쌓아 대비.
54. 광개토대왕 9년(400년)연왕 모용성 3만군사로 침입. 남소성, 신성을 빼앗아감.
55. 광개토대왕 11년(402년) 숙군성을 공격. 연나라 평주자사 모용귀 도망.
숙군성은 어디인가?
56. 광개토대왕 13년(404년) 연나라를 침략.
57년 광개토대왕 14년(405년) 연왕 모용희 요동으로 와서 침.
58. 광개토대왕 15년(406년) 연왕 모용희 글안을 습격. 경북을 치다가 우리 목저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