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역사

집안이 고구려 수도 국내성이라는 사람들

개울가솔바람 2009. 6. 24. 12:28

[삼국사기]를 정독해 본 사람은 곧 알게 된다.

오늘날 집안이 국내성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고 나아가 집안은 국내성이 결코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고고학적 유물이 있다.

[관구검기공비]가 그것이다.

 

현재 전하는 비석의 크기는 길이 약 25.8cm, 너비 약 26.4cm이며, 비문의 서체는 예서체이고, 각 글자의 간격은 약 2.7cm이다. 244년(동천왕 18) 8월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해 전쟁에 이긴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 비석의 일부분이 1906년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반스링[板石嶺]에서 발견되었다. 비의 좌우와 아래가 떨어져나가 내용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으나, 남아 있는 부분을 보면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巍烏丸單于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이라고 씌어 있다. 이 비가 새겨진 연대에 대해 245년과 246년 2가지 설이 있는데, 대체로 245년으로 보고 있다. 관구는 성, 검은 이름으로 보고 있다.

                  -브리태니커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의 기공비가 집안현 반석령에서 발견된 것이다. 가장 타당한 해석은 오늘날 집안이 국내성이 아니라 환도성이라는 것이다.

나는 삼국사기를 읽으며 고구려가 환도성으로 천도한 때마다 특이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장차 중국대륙세력의 침략이 예상되는 때마다 방어적인 개념으로 천도를 단행하는데 천도지가 거의 환도성이었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는 평상시 혹은 공격적인 팽창정책의 시기에는 집안의 서쪽으로 나아가고 수세적인 국면에선 환도성으로 물러났다.

오늘날 집안을 보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라는 점과 어딘가 고구려대제국의 수도로선 알맞지 않게 옹색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 집안은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시기의 수도였다는 것이 그 까닭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많은 시기의 수도는 어디였을까?

나는 오늘날 요양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었다고 믿는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고구려 멸망시 수도가 오늘날 북한 대동강의 평양이 결코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대수.당전쟁의 전초기지는 그럼 오늘날 요하일 수가 없다.

그것은 오늘날 난하였다.

고구려의 서쪽 전초기지의 중심은 요동성이다.

 

그럼 [삼국사기]는 뭐라고 할까?

수양제의 침입때다.

"양제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요수에 이르렀으나 우리 군사가 항거, 수나라군사는 건너지 못했다. 부교를 만들어......언덕에 뛰어올랐으나 전사웅, 맹차 등과 모두 전사. 여러 차례 잇따라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워 우리 군사가 패전하여 죽은 자가 만 명. 이긴 기세를 타고 나아가 요동성을 포위하니 이 성은 곧 한나라의 양평성이다."

 

수양제가 포위한 요동성은 요하지역의 요양이 아니라 한나라의 양평성 곧 난하 동쪽 노룡이었다는 말이다.  

한나라 양평성이 어딘가에 대해서는 당나라 시기 이현의 한서지리지주석이 말해준다.

襄平  縣  屬遼東郡  故城在今 平州盧龍縣西南

 

 평주노룡현인 곧 양평성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전진기지였고 수양제가 포위했던 요동성은 바로 노룡현 서남에 있던 그 성이거나 고구려가 새로 쌓은 그 지역의 매우 큰 성이 된다.

그럼 이곳이 왜 요동성인가?

 

사람들은 잘 이해하려 하지 않겠지만 난하 유역은 예맥족의 활동근거지였다가 위만과 한무제의 공벌로 다수의 예맥족이 동쪽으로 밀려나 여러 나라들을 세웠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졸본부여, 곧 고구려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예맥족이 전부 이동한 건 아니다. 이 지역의 언어습속과 문화를 유지하며 계속 살아온 예맥족의 전통은 수세기에 걸쳐 끊이지 않았고 고구려 역시 옛땅을 다시 찾으려는 강력한 열망으로 서진정책으로 끊임없이 추구했다. 결국 미천왕대 이 인근의 낙랑군을 섬멸하고 지역을 확실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 지역을 다시 빼앗겼을 때 다시금 광개토왕은 북경까지 [사방합전], 즉 동시다발적 무력공격을 통해 북경일대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이 지역을 일상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항상 이 지역은 중국대륙세력과 고구려, 혹은 선비족등 북방민족들의 쟁탈전이 수시로 전개되어 뺏고 빼앗기는 소란스러운 지역이었다.

바로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올바른 고구려사를 복원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상한 헛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교수라는 학자들이 떠들어대길 고구려는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에서 건국했다는 그런 말들 말이다.

고구려가 고구려현에서 건국했다면 유리왕이 다시금 현도군을 공략하여 빼앗았다는 고구려현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이들은 현도군이 현명까지 짊어지고 이동했다고 믿는 모양인데 그냥 웃고 넘거가면 될 일이다.

 

바로 이 시기나 훗날 연개소문의 시대에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오늘날 요양인근이었다.

결코 북한의 대동강변의 평양이 아닌 것이다.

고구려의 많은 왕들은 수세적인 시대에 수도를 환도성으로 옮겼지만 연개소문고 보장왕은 결코 환도성으로 옮기지 않았다. 끝까지 당나라와 싸워 이길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이것은 옳은 결정이다. 실제로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시기에 환도성으로 천도를 했지만 환도성은 그 때마다 함락되곤 했다. 수도방어는 단지 지형적 잇점만으로 방어가 되는 것이 아님을 역사는 보여준다.

 

고구려사를 다시 복원하자. 나는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다. 오늘 복기대 박사의 글에 관한 뉴스기사를 보았다. 고구려 국내성이 오늘날 요양이었다는 주장이다. 나는 전적으로, 열렬하게 지지하는 바이다. 고구려의 가장 오랜 수도는 집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주장이 하루빨리 역사의 상식으로 자리잡길 바랄 뿐이다.